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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ISTRAKH, David(17th Sep. 1908~24th Oct. 1974)

[ Inexhaustible source of musical joy ]

First appeared at Classical Forum of Freechal on Jun. 2003
Partly corrected on Dec. 2003

1. Curriculum Vitae

   아이작 스턴은 그가 죽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그가 죽음으로써 세계는 훨씬 더 지리한 곳이 되고 말았다. 그는 진정 보석같은 인간이었다." 하인리히 노이하우스(Heinrich Neuhaus)'놀라운 예술가'라 했던, 20세기 중반의 탁월한 거장이자 좋은 아버지며 스승, 전혀 편견 없는 공정한 사람(특히 콩쿠르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그는 바로 다비드 표도로비치 오이스트라흐다.

   그는 현 우크라이나의 흑해 연안 오데사(Odessa)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지방의 명교사 스톨리아르스키에게 배우고,이 때부터 독주곡과 실내악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고 전한다. 오데사는 이 시기 뛰어난 연주가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오이스트라흐 부자(父子)를 위시하여 다비드보다 4년 연상인 밀스타인, 8년 연하인 길렐스가 모두 여기 태생이고, 멀지 않은 키에프에서는 5년 전에 호로비츠, 지토미르(Zhitomir)에서는 1915리히테르가 태어났다. 당시 세대의 소련 명연주가 반 이상인 셈이다.
   
그는 1932년 모스크바에 와서, 여기서 점차 대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참가한 국제 콩쿠르였던 1935년 바르샤바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서는 2위였다. 프랑스에서 온 16세의 여성이 그를 밀어냈는데, 심지어 소련 심사위원마저 그녀에게 점수를 더 줬을 정도로 그녀의 연주는 강력했다. 당시 7세의 여자 아이가 참가자 중에 있었는데,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특별상만 탔다. 이 아이는 아직까지 현역에서 뛰고 있다. 너무 유명한 일화라 이 두 사람의 이름을 굳이 여기 적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1).
   2
년 뒤 벨기에의 이자이 콩쿠르(지금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는 다비드는 긴장으로 인해 호흡 곤란까지 겪었다. 심사위원에는 자크 티보, 프란세스카티, 크라이슬러 등이 있을 정도로 쟁쟁했다. 다비드가 회장에 들어왔을 때 리햐르트 오드포노스프(Richard Odponosoff)가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그의 연주는 다비드가 '기가 막혀서 나는 축 늘어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부인 타마라에게 편지했을 정도로 훌륭했다2). 이런 대단한 경쟁자와, 긴장으로 인한 좋지 못한 컨디션에도 불구하고 결선에서 심사위원들은 다비드를 우승자로 선택하여 자신들의 안목을 증명했다.
   
그 후 곧 2차 대전이 터졌다. 1941년 이후 다비드는 이미 최전선이 되어 버린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오가며 연주회를 적극적으로 열었고, 종전 때는 이미 소련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이 확고했다. 1945년 서방 연주가로는 거의 처음으로 예후디 메뉴힌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그를 만났을 때, 메뉴힌은 "그는 서방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후에 회상했다. 둘은 바흐의 2대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연주했고, 평생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메뉴힌은 7세 연상인 다비드에게 서방 망명을 권했을 정도로 스스럼없이 지냈다고 한다.
   1955
년 길렐스와 그를 포함한 소련 최고의 예술가들이 서구 연주 여행에 나섰다. 다비드는 카네기 홀에서 1130일 처음 미국 연주회를 열었는데, 이 때 사무엘 두시킨(Samuel Dushkin), 크라이슬러, 슈바르츠코프 등 이름만으로 충분한 거물들이 대거 객석에 앉아 있었다. 토스카니니가 "그는 모든 바이올리니스트들의 빛을 흐릴 것이다"고 평했고, 어느 평론가가 "내가 본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이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953년에 영국 Columbia(EMI)에서 이미 녹음을 시작했는데, 1955년 여행 때의 녹음은 RCA생상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와 쇼송 '시곡', 미국 Columbia에 오먼디 지휘 비발디 협주곡(스턴과 같이), 모차르트 4, 멘델스존, 미트로풀로스 지휘 쇼스타코비치 협주곡 1, DG에 콘비츠니 지휘로 브람스와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 등이 남아 있다. 이 후 오보린,크누셰비츠키와 1941년 결성하여 1963년 크누셰비츠키가 죽기까지 가졌던 트리오 활동, 1967년 이후 리히테르와 연 듀오 연주회, 각지에서 벌인 독주 활동 등으로 하이페츠와 함께 그야말로 '바이올리니스트의 차르'로 군림했다. 게다가 제자 중 하나인 아들 이고리(Igor)1급 연주자였기 때문에, 팬들은 'King David, prince Igor'라고 부자를 애정을 담아 불렀다.
   
그는 지휘도 많이 했는데, 1958년 영국 Columbia의 모차르트 협주곡 3번 레코딩 세션에서 지휘할 예정이었던 베테랑 알체오 갈리에라(Alceo Galliera)가 갑자기 지휘가 불가능해지자 지휘봉을 떠맡긴 월터 레그 때문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경험이 처음이었다고 한다3). 이 녹음 세션은 뜻밖에도 아주 잘 진행됐고, 다비드는 그 후 레코딩 스튜디오 뿐 아니라 실제 무대에서도 가끔 지휘자로 등장했다. 아들 이고리는 "아버지가 바이올린의 구석구석까지 능통하시기 때문에 협연은 아주 쉽습니다"고 말했다. 1974년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의 브람스 교향곡 사이클에서 지휘하기 위해 다비드는 암스테르담으로 왔는데, 1023일의 연주회 후 24일 호텔 방에서 심장마비로 손 쓸 사이도 없이 아내 타마라(Tamara)가 보는 앞에서 별세하고 말았다4). 전세계가 그의 이른 죽음을 애도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바이올린은 마르지 않는 음악적인 기쁨의 샘이었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닿는다.

2. His Art

◀ 모차르트 소나타 선집(Eurodisc)의 일본 발매 CD jacket

   다비드의 연주력은 정말 훌륭하다. 최만년까지 기교에 거의 흠집이 없고, 이고리의 회상처럼 "레파토리가 거의 무제한에 가까왔고, 게다가 끊임없이 영토를 넓혀갔다". 협주곡 뿐 아니라, 소품, 특히 실내악까지 모든 레파토리가 다 멋졌는데, 이는 아쉽게도 하이페츠가 지니지 못한 덕목이다. 이런 만능성은 리히테르 정도만이 비교의 대상이 될 텐데, 다비드는 리히테르처럼 실내악에서 너무 강한 개성으로 균형에 불안함을 주는 일은 결코 없었고 레파토리를 까다롭게 고르지도 않았다. 게다가 카라얀처럼 (역시 레파토리의 폭에서 경이적이긴 했지만) 일부 레파토리에서 크게 비판받지도 않았으니 정말 경이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협주곡의 스케일 큰 조형력과 빛나는 해석, 실내악의 온화함과 동료들에게 자신을 맞추는 능력은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그의 인품을 보는 듯 하다.

   우선 협주곡부터 보면, 그가 매우 즐겨 연주했던 베토벤과 브람스가 떠오른다. 베토벤 협주곡은 몇 종 있지만 주로 가우크 협연(Melodiya)클뤼탕스 협연(EMI)이 회자된다. 후자가 구하기도 쉽고, 스테레오의 좋은 음질로 이미 수많은 애호가를 확보했다5). 이 음반에서 그의 바이올린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베토벤의 '강렬함'이 충분하지 않다는 불평이 있지만, 무리없는 두 사람의 음악 만들기와, 약간 굵직하면서 온화하고 청명하기 이를 데 없는 바이올린 소리는 왜 이 음반이 그토록 오래 인기가 있는지 잘 설명해 준다. 그는 만년에 빈 필하모닉과 베토벤을 다시 녹음하기를 원했다는데, 아쉽게도 실현되지 않았다. 3중 협주곡은 EMI2개가 있는데, 오보린 및 크누셰비츠키와 런던에 1958년 연주 여행했을 당시 녹음한 구반과 1969년 베를린에서 리히테르, 로스트로포비치와 녹음한 신반이 있다. 큰 스케일과 화려한 독주진에서 후자가 일반적으로 높이 평가되는데6), 불행히도 녹음 연도에 비해 음향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개인적으로는 양편을 모두 좋아한다.
   
브람스 협주곡은 DG의 콘비츠니 협연보다 음질이 좋은 EMI의 두 가지 협연이 힘찬 연주로 평판이 높다. 1960클렘페러를 파리로 초빙한 녹음과 미국 Columbia의 양해를 얻어 지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연주한 녹음이 있고, 현재 모두 본사 발매로 구할 수 있다. 2중 협주곡도 EMI에 녹음이 2개 있는데, 전자는 푸르니에의 잘 화합하는 연주가 좋고 후자는 로스트로포비치의 큰 스케일과 셀 지휘 클리블랜드의 철저히 연마된 협연이 매력적이다. 이 쪽에서는 전체적으로 후자가 더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다.
   
멘델스존 협주곡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정말 '쫙 빠진' 미끈한 연주인 오먼디 협연(Columbia)은 아쉽게도 모노랄이고 라이선스 CD가 폐반된 지금은 구하기가 어렵다. 콘드라신 협연(Melodiya)이 대안이 될 만 하다는 의견이 많은데, 녹음은 더 낡았다.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 협주곡은 오먼디 협연(Columbia)과 로체스트벤스키 협연(Melodiya)이 모두 높게 평가된다.
   
이 외에는 바흐(DG), 바르토크 1(Melodiya), 브루흐 1(EMI), '스코틀랜드 환상곡'(Decca), 랄로 '스페인 교향곡'(EMI), 드보르작(Melodiya), 글라주노프(Melodiya), 힌데미트(자작 자연, Decca), 모차르트 1~5번 전집(자신의 지휘; EMI), 4(Columbia; 오먼디 협연), 스트라빈스키(Philips), 비오티 22(Melodiya), 비발디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들(스턴, 오먼디 지휘 Columbia)이 있다. 대부분을 아직까지 구할 수 있다.

◀ 베토벤 '대공' 트리오의 일본 발매 LP jacket

   그의 실내악은 단연 최고급이었다. 우선 오보린, 크누셰비츠키와 가진 트리오 활동을 뺄 수 없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동료였던 오보린과는 1938년부터 연주했고, 이 듀오에 볼쇼이 극장 첼로 수석이었던 스비아토슬라프 크누셰비츠키를 1941년부터 참가시켰다. 이 트리오는 사실상 20세기 중반 최고의 앙상블 중 하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쉽게도 스테레오 녹음은 1958년 런던 연주 여행 당시 녹음한 베토벤 '대공'과 슈베르트 1(EMI)밖에 못 봤는데, 사견으로는 오이스트라흐 최고의 녹음 중 하나다. 차이코프스키, 하이든, 스메타나, 림스키 코르사코프, 라벨, 라흐마니노프 등의 작품들이 Melodiya에 남아 있다.
   
듀오 활동으로는 우선 오보린이 반주를 맡은 녹음을 들 수 있다. 가장 인기있는 녹음은 단연 베토벤의 소나타 전집(1962, Philips)이다. 슈베르트 소나타와 그리그 2(Melodiya)도 인기 있다. 이 외에 EMI의 모노랄 시대에 한 녹음도 몇 있고, 얌폴스키가 반주한 것도 있다. 그의 듀오 활동 중 리히테르와 1967년 이후 가진 실황 녹음들은 특출나다. 리히테르의 강렬한 표현에 결코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오보린 협연 때보다 더욱 힘 넘치는 연주를 들려 준다. 브람스 3번과 프랑크는 이미 정평이 높은데, 자세한 설명은 리히테르 페이지에서 이미 했으므로 여기서는 줄이고 싶다. 이 외에는 바우어와 녹음한 브람스 1번과 타르티니 소나타(Melodiya), 슈베르트의 환상곡과 소나타 A장조(Melodiya), 드뷔시와 라벨(Philips), 야나체크(Melodiya), 바두라-스코다와 녹음한 모차르트 소나타 5곡과 변주곡 2(Eurodisc), 바흐의 소나타(DG), 최근에 Testament에서 발굴한 EMI의 많은 녹음들과 Doremi에서 발매된 Melodiya의 오래된 녹음들과 방송 녹음 등이 흥미를 끈다. 크누셰비츠키가 첼로로 참여한 오이스트라흐 4중주단 활동이 재미있는데, 아쉽게도 녹음이 드물다. 바흐의 무반주 작품 녹음이 한 곡밖에 없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20
세기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에서 그는 초연을 맡은 경우가 많았고, 당시 거의 모든 소련 작곡가들이 이 소련의 국민적인 예술가에게 작품을 헌정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특히 하차투리안과는 거의 같은 연배라 친했다고 하는데, 협주곡의 자작 자연이 EMI(모노랄)Melodiya(스테레오) 2개의 스튜디오 녹음으로 남아 있다. 능수능란하며 전혀 거침이 없는 연주다. 협주곡부터 열거하면, 카발레프스키(자작 자연, Melodiya), 프로코피에프 1(Melodiya, EMI), 2(EMI), 쇼스타코비치 1(Columbia, Melodiya, EMI), 2(Melodiya) 등이며, 프로코피에프나 쇼스타코비치의 경우처럼 실내악의 초연도 많이 맡았다. 대부분 음반이 남아 있다.

   예술가 중에는 의외로 성격이 모나거나 '비상식적인' 사람이 꽤 많다. 바그너처럼 모순된 성격의 소유자도 있고, 포이어만처럼 '배은 망덕'이라 해야 할 사람도 있다. 하지만 다비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서방 음악가들의 풍요로운 삶을 부러워했지만, 망명을 권유한 메뉴힌의 말에는 단호하게 "나를 키워 주고 지금의 자리를 준 것은 국가다"고 거절했다. 현명하고 공정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누구에게나 공평히 대했고 젊은 재원들에게는 누구의 제자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몸을 아끼지 않는 스승으로 제자들에게 "그분은 아버지처럼 저를 돌봐 주셨습니다"란 말을 들었다. 또 겸손이라는, 이런 거장에게는 흔치 않은 미덕마저 있었다. 런던 연주 여행 중 하이페츠의 연주회가 같은 시기에 열림을 알고 찬조 출연해 주었는데, 하이페츠가 답례로 자신의 연주회에 출연하자 연주회 후 무대 뒤에서 "우리는 서로 배우고 있습니다"라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다.
   
이 정도면, 콘드라신에게 받은 "그가 연주할 때는 세상이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는 음악적인 칭찬과, 첫머리에서 인용한 아이작 스턴7)의 말처럼 "그는 진정 보석같은 인간이었다"는 인간적인 칭찬을 같이 받아 마땅하다. 능력과 겸손, 인간성 세 가지를 한 몸에 갖춘 드문 인간, 그는 좀 더 세상에 오래 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Sources & Links

  1. Oistrakh.com ; 아쉽게도 불어다. 하지만 매우 정보가 많으며, 특히 디스코그라피가 좋다. Jean-Michel MolkhouPaul Geffen 두 사람의 디스코그라피는 정보의 양에서는 인터넷 상에서 볼 수 있는 어느 예술가의 것에도 뒤지지 않는다.  (굳이 내가 디스코그라피를 따로 만들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2. Record Review(Korean), Apr. 1994

각주 ]

  1. 지네트 느뵈(Ginette Neveu)가 우승자고, 그 어린 아이는 이다 핸델(Ida Haendel)이었다. 정말 대단한 참가자들 아닌가!
  2. 오드포노소프는 빈에서 콘서트마스터로 재직 중이었는데, 오케스트라 일을 끝내고 밤차로 브뤼셀로 와 콩쿠르에 참가했다고 한다. 그는 바인가르트너의 지휘로, HMV3중 협주곡을 녹음했을 정도로 당시 상당히 지명도가 있었다.
  3. 이 레코드는 EMI forte 시리즈로 아직 살아 있다.
  4. 그의 바쁜 일정이 한 몫 했음이 분명한데, 정치적 성향이 거의 없었던 그를 교사와 콩쿠르 심사위원, 연주 여행 등으로 '과도하게 부린' 소련 당국에 결정적인 책임이 있다.
  5. 지금은 EMI 본사 낱장 CD는 폐반됐으나, Testament에서 LP로 발매하고 있으며 일본 도시바의 ART 복각 시리즈로 낱장을 구할 수 있다. 아니면 17장의 EMI 녹음 전집을 선택할 수도 있다.
  6. 리히테르의 회상에 의하면, 이 베를린 녹음 세션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한다. 카라얀은 자신의 해석을 양보하지 않았고, 카라얀에 동조한 로스트로포비치와, 그렇지 않았던 오이스트라흐와 리히테르 둘이 '거의 따로 놀았다'고 한다. 음악에 '이상한 긴장감이 감도는' 점이 무리가 아니다....
  7. 음악적으로는 어땠건, 콩쿠르 심사위원으로서까지 항상 공정했다고 말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c) 2003~ , 이영록 ; 링크는 자유지만, 인용하시려면 우선 제게 메일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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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ed ; 25th Dec. 2003
Last update ; 7th Ma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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